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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th management

귀주대첩 - 생강의 효능








귀주대첩 전후 고려는 거란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졸 가족에게 당시 최고의 식품이었던 차와 생강을 하사하는 등 극진한 예우를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고려는 북방 거란으로부터 자주 침략을 당했다. 급기야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현종이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전남 나주까지 피난 가는 상황도 벌어졌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현종 9년인 1018년 8월에 임금이 교시를 내려 전사자에 대한 보상을 지시한다. “을묘년(1015) 이래 북방 전선에서 전사한 장수와 병사의 부모·처자식에게 계급에 따라 차와 생강, 베를 하사하라(賜茶, 薑, 布物).”고 했다.


보상으로 내린 생강과 차, 베는 진귀한 것이 었다. 지금은 생강이 주로 김치를 담글 때, 혹은 요리할 때 들어가는 양념에 지나지 않지만, 옛날에는 생강은 엄청나게 귀한 향신료였고 양념이라기보다는 주로 약재로 사용됐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삼보다도 생강을 더 귀하게 여겼다. 불과 124년 전의 기록인 고종 27년의 승정원일기에서도 생강에 대한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해 손님맞이 연회상이 차려졌는데 전례에 따라 임금의 다례상에는 연한 생강차, 사신의 다례상에는 인삼차가 올랐다. 영조 때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임금이 사돈이자 원로 대신인 홍봉한에게 차를 대접하는데 승지가 인삼차를 올리겠다고 하니 영조가 인삼차 대신 생강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임금이 마시는 차와 사신, 신하가 마시는 차의 격식을 달리했던 것이니 생강차가 인삼차보다 한 단계 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생강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인식은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초에 가까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강에는 따뜻한 기운인 양기가 가득 차 있어 정력에도 좋고, 물에 담갔다가 말려 먹으면 묘한 작용을 해서 풍증이 사라지고 위와 장이 편해지며, 달여 먹으면 관절통도 거뜬해져 부축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거의 만병통치약 으로 평가받는 수준이다.


역대 조선 왕의 치적을 모아 기록한 책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이다. 여기에 인종이 제12대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취임 선물로 신하들에게 생강을 하사했다고 나온다. 





“생강 먹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하늘과 통하기 위한 것이고, 더럽고 나쁜 것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여러 군자가 언제나 공자를 사모해 작은 음식도 모범으로 삼도록 생강을 하사하니 서로 전하여 그 뜻을 새기도록 하라”고 말한다.


논어에 “식사를 할 때 생강을 빼놓으면 안 되는데 많이 먹지는 않는다”고 했다. 공자의 이 말에 주자(朱子)가 주석을 달았는데 생강은 신명(神明)과 통하는 음식으로 더럽고 불결한 것을 제거하기 때문에 식사할 때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해석을 한 것이다. 공자에 더해서 주자까지 이렇게 해석을 했으니 유교를 받들었던 조선의 군주와 양반들은 생강을 고귀함과 강직, 정결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이다.


1018년 12월,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이때 재침공을 예상하고 20만의 군대를 준비하고 있다가 거란에 맞섰다. 거란군은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의 공격을 받고 대패했는데 1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사람은 불과 2000명이었다.